동암장학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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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巖선생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이 아니면 산업을 해서 그 이익을 세상에 갚을 줄 알면 적은 도리를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東巖회장 손도익은 산업을 일으켜 사회에 봉사하고 국익에 헌신한 기업가이다. 월성손씨이니 취헌공 진강과 인동장씨에게서 1921년 신유 12월 25일 월성군 강동면 압실(앞실)에서 태어났다. 자는 成哉이요 東巖은 호이다. 손씨는 신라흥덕왕때 효자 孫順을 시조로 한다.
조선조에는 손사성이 병조참의를 지냈으며 손소는 이조참의를 역임했으며 그 아들인 중돈이 이조판서를 역임하시었고 월성군에 봉해졌고 東江서원에 제향되신 우제선생이시니 월성손씨의 현조이시고 東巖선생은 그의 15대손이시다.

열한살에 백부에게서 입양되어 7대 종손으로 어머니와 함께 살림을 돌보게 되었다.
기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에 향리서당에서 한학을 이수했으며 12세에 도일하여 견문을 넓혀 1940년에 귀국하여 영농에 전념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피난하여 1951년 무산연탄공장을 설립하였다. 당시 화목이 주연료이던 것을 석탄 연소통을 개발하여 땔감의 변혁을 이끌었고 부산환도로 연탄수요가 급증 됨에 윤탄식제조기로 신풍을 일으켰으며 1967년 10월 왕표연탄으로 저명한 기업이 되었다.

울산에너지, 경남에너지, 경동탄광 등을 설립하면서 연료업계에 우뚝하게 되었고 1999년에 ㈜원진, ㈜경동등 9개사를 그룹으로 탄생시킨 창업주가 東巖이시다. 공의 기업이 여기까지 온 데는 인고의 실천과 경영신념의 결실이요 쉽게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매사에 친절하고 성심성의를 다하여 봉사정신을 발휘하면서도 엄하고 통솔력이 있었다.

창업 초부터 사원들의 내집갖기운동을 펴서 새마을금고를 만들어 고리채를 쓰던 빚을 갚게 하고 동암장학회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며 향리의 효자효부를 표창하였다. 1981년 온천3동에 경로당을 기증하니 후락정이다. 1990년에는 경동광업소가 개소 된 이후 순직사원들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한 도덕정사를 건립하셨다. 또 위선사업으로 누대묘소에 의물을 갖추었으며 경모정을 지어 일가의 돈독을 꾀하였고 동강서원의 정화사업에도 힘썼으며 도산서원유사를 역임하였다.

공은 유교적바탕에서 고통도 나누면 쉽고 부도 나누면 더욱 큰 부가 된다는 공생자본주의 경영자였다. 70이 넘어서는 <八十生涯回想記>를 써서 어려웠던 시대를 진솔하게 피력하였다.
공의 논고 <한국석탄산업의 역사>는 東巖의 생활사요 연구업적이다. 공이 2001년 9월 8일(음)에 향년 81세로 서거하시니 돌아보면 공은 기우가 넓으시고 용모도 헌헌장부이셨다. 東巖이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니 가정에서는 중흥의 조상이 될 것이며 연탄산업을 발전시켜 국익을 증진시켰으니 애국이요. 사회봉사로써 화목하고 의리를 소중히 한 생애였다.

1938년 산업유공훈장을 받았고 도덕정사에는 삼척군민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힘써 일하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군자는 끝맺음이 있음에 길하다 하였더니 東巖의 팔십생애는 인고와 정성으로 기업을 창업하였으니 왕표에서 원진까지 금자탑을 쌓고 그 고진감래를 자서전에 담아 감동시켰으며 재물은 절약하여 봉사와 위선에 힘썼고 복은 아껴서 후손에게 주었으니 부도 성인의 덕과 같아서 우러러 흠모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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